서랍 정리를 하던 중, 1년 전에 샀던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움보다는 약간의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그래, 또 그랬지…’
늘 그렇듯 시작은 거창했지만,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작년 이맘때쯤, 손글씨를 잘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찾아왔다.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를 보면 어쩐지 마음도 정돈되는 것 같았고, 나도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유튜브에 손글씨 관련 영상을 검색하다가, 만년필로 책을 필사하는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종이 위를 사각사각 흐르는 펜촉, 잉크의 깊이감, 느릿한 필기의 리듬… 그 영상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관심은 금세 연장으로 옮겨갔다. 저가형 입문용 만년필을 하나 구입하고는, ‘이게 끝이겠지’ 했던 나의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양한 펜촉, 수십 가지 색의 잉크, 종이의 질감까지… 이 세계는 너무도 깊고 넓었다. 단지 손글씨를 잘 써보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만년필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새로운 욕심으로 바뀌었다.
결국 한 달 만에 만년필 4자루, 노트 2권, 연습용 종이 3권이 책상 위에 쌓였다. 만년필용 노트 가격이 생각보다 훨씬 비싸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것도 잠시, 의지는 점점 시들해졌고, 결국 대부분의 장비는 당근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나갔다. 남은 건 만년필 한 자루, 노트 두 권뿐.
그런데 지금 다시, 손글씨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이전보다 더 조용히, 욕심을 덜고, 천천히 시작해보려고 한다. 장비보다 중요한 건 ‘계속 쓰는 마음’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만년필은 여전히 서랍 속 그 자리에 있다. 이번에는, 그 한 자루로도 충분하다고 믿으며 다시 펜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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