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의 인생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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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노트

14명의 대법관으로 모든 상고심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다른 국가들은?

by 청파 2025. 5. 2.

대한민국 대법원

 

대한민국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단 14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중 법원행정처장 1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한 대법관 1명은 행정 또는 외부 업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으로는 약 12명의 대법관이 재판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헌법과 법률은 대법원이 모든 상고 사건을 직접 심리하고 판결하는 3심제의 최종 단계로 기능하도록 정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도 사실상 대부분의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심리 범위와 재판 부담에 비해 대법관 수는 지나치게 적다. 이는 영미법계 국가뿐 아니라 유사한 법체계를 가진 대륙법계 국가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이며, 제도 설계의 비효율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1. 영미법계 국가: ‘선택적 심리제’로 효율을 추구하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영미법계 국가들은 대체로 대법관 수가 9~12명 정도로 대한민국보다 더 적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고허가제(leave to appeal)’ 또는 ‘선택적 심리’ 제도를 통해 대법원이 심리할 사건을 선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연방대법원은 매년 수천 건의 상고 신청 중 약 1~2%만을 심리 대상으로 채택한다. 이는 대법원이 단순한 분쟁 해결 기구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와 공공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사건을 선택적으로 심리하는 판례 선도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대법관으로도 충분히 효율적인 역할 수행이 가능하며, 법률의 통일성과 방향성 정립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다.


2. 대륙법계 국가: ‘분산 심리’와 ‘요건 제한’으로 해결

대한민국과 같은 대륙법 전통을 따르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도 많은 수의 대법관들이 상고심을 운영하고 있으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대법관 수는 독일 130명, 프랑스 85명 이상, 이탈리아 350명 이상, 스페인 80명 이상, 일본 1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들 국가는 대법원이 사건을 직접 전부 심리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과중한 부담을 분산한다.

재판부 다원화: 예를 들어, 독일 연방대법원은 약 130명 이상의 판사가 분야별로 재판부를 구성하고 있어, 판결은 소속 부서 단위에서 진행된다.


상고 제한 제도: 대부분의 사건은 법률적 쟁점이 있는 경우에만 상고 가능하며,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고를 기각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사건의 본안 심리 전에 ‘불수리’로 상고가 막히는 일이 흔하다.


법률심의 원칙: 상고심은 사실관계 판단이 아니라 법 적용의 타당성만 판단하며, 하급심의 사실판단을 되돌리는 일이 드물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대륙법계 국가들은 다수의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판례 통일과 법의 일관성 유지라는 대법원의 핵심 기능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3. 대한민국: 모든 사건을 대법관 14명(실제 12명)이 직접 판단

반면, 대한민국은 현실적으로 사건의 크고 작음, 중요성과 무관하게 모든 상고 사건을 대법원이 심리한다. 형식적으로는 상고 제한이 가능하나, 실무상 거의 모든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며 대법관들은 매년 수천 건의 사건을 소부와 전원합의체로 처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대법관 1인당 연간 수백 건의 사건을 담당 → 정밀한 판례 해석·법리 발전에 투입할 시간 부족
재판 지연과 업무 과중 → 실질적 재판의 질 저하
전원합의체의 역할 축소 → 중요한 사건조차 정밀한 합의보다 단순 병목 처리


이는 제도 자체가 비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관 수조차 매우 부족하다는 구조적 결함을 보여준다.

4. 결론: 인원 확대와 함께 제도 개편이 병행되어야

한국의 대법원이 현행과 같은 전면적 3심제 구조를 유지할 것이라면, 최소한 대법관 수를 지금보다 3배 이상 확대하거나, 재판부 분산과 전문화를 도입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상고허가제 도입, 법률심 중심의 상고심 개편 등을 통해, 대법원이 본연의 기능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

다른 선진국들이 이미 채택하고 있는 효율적 상고제도를 외면한 채, 소수의 대법관에게 전 국민의 모든 사건을 쏟아붓는 현재의 방식은 비효율을 넘어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의 침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법 왜곡 현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