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6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전격적으로 제안한 ‘조기 대선과 개헌 동시 실시’ 발언은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을 오는 6월 3일 조기 대선과 함께 추진하자”는 이 제안은 시기상 부적절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방향을 잃은 ‘헛발질’에 가깝다.
먼저, 현실적·법적 측면에서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상이다. 대선일까지는 고작 50여 일밖에 남지 않았고, 그 사이 여야가 개헌안을 마련하고, 국회를 통과시키며, 국민투표 공고까지 마친다는 건 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졸속 개헌이 아닌 이상, 이는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공상일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합의다. 지금 대한민국은 내란의 소용돌이에서 간신히 벗어나려 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은 단지 한 사람의 퇴장이 아니라, 헌정질서를 파괴한 세력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자,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도 개헌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지금 이 시점에 들고 나와 ‘대선 프레임’을 흐리고, 민주 진영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려는 것은 오히려 내란 세력에게 우회로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번 사안을 두고 “개헌은 필요하지만 지금은 내란 종식이 먼저”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5년 단임제의 한계를 넘기 위한 4년 중임제 논의,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등에는 공감하되, 그것이 윤석열 파면 이후의 민주적 전환과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대표의 발언은 당연한 상식이자, 지금 이 시국에서 유일하게 책임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사실 개헌은 단지 ‘법 조항’을 고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며, 국민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고, 따라서 반드시 숙의와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 촛불로 대통령을 바꾸고, 탄핵으로 독재의 씨앗을 걷어낸 이 시대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 엘리트들의 뒷방 밀실에서 이뤄지는 ‘야합 개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사실상 ‘내란 방조 정당’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그들과 손잡고 개헌 논의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 정당성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기도 하다. 내란이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헌 논의는 단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민적 에너지의 소모이자 분열로 귀결될 뿐이다.
우원식 의장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장으로서, 국민적 신뢰를 받아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내란 심판 직후 불쑥 개헌을 꺼내 들며 국민적 기대를 허물고, 민주진영 내부에 혼선을 초래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정치권의 책무는 새로운 헌법이 아니라, 헌법을 파괴한 세력의 단죄와 민주주의 회복이다.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개헌이 아니라 ‘심판’이며, ‘회복’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무너진 집의 기둥을 세우기도 전에 인테리어를 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개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 아닌,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시민과 함께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미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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