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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파시즘은 이렇게 시작된다 – 양꼬치 골목의 혐중 시위를 보며

by 청파 2025. 4. 23.

4월 17일, 서울 광진구 ‘양꼬치 거리’에서 ‘중국인 퇴출’이라는 문구를 내건 시위가 벌어졌다. 조용하고 활기찬 이 골목은 오랜 시간 중국동포와 다양한 외국인 커뮤니티가 뿌리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한 무리의 시위대는 '차이나타운 철폐', '중국인 퇴출'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이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낯선 공포를 안겼다.

 

이 장면을 보며 떠오른 이미지는 한없이 불길했다. 오래전 다큐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치 완장을 찬 이들이 유대인을 향해 ‘국가를 더럽히는 존재’라며 외쳤던 1930년대 독일의 거리 풍경. 당시에도 허위 선동은 빠르게 퍼졌고, 진실은 공격받았으며, 침묵은 공모로 간주됐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혐오의 거리에도 그와 비슷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혐오주의는 파시즘의 본질이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파시즘은 단지 정치적 독재체제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 기술이었고, 그 핵심에는 ‘혐오의 정체성’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은 모두 내부의 적과 외부의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국민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유대인, 공산주의자, 성소수자, 외국인… 그들은 사회 문제의 책임자로 지목되었고, 공포와 분노는 정치적 동원 도구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중국 혐오’는 이 파시즘적 감정 조직의 복사판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일부 네티즌의 분노 표현이 아니다. 특정 정치세력은 이를 집회와 선전의 중심 의제로 삼고 있으며,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언론조차 ‘혐중 정서’를 사회 분위기로 포장하며 암묵적으로 그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다름 아닌 정치적 파시즘의 싹이다.

‘중국 혐오’는 한국 사회의 진짜 위협인가?


물론 중국 정부의 패권적 행보나 일부 유학생, 유입 자본이 초래한 불균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중국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배척하려는 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것은 구조적 원인을 은폐하고, 약자에 대한 분노로 시선을 돌리는 전략이다. 마치 1930년대 독일이 경제 위기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은 실상 이익이 아니라 배제의 감정에 기반한 정체성이다. 우리가 분노할 진짜 대상은 불평등한 경제구조, 외국자본에 종속된 부동산 정책, 그리고 이를 방치해 온 국내 정치권의 무능함이다. 

사회 전체가 혐오에 맞서야 할 때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파시즘적 혐오 정치를 사회 안에서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단호히 거부할 것인가. 혐오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침묵은 동조이며, 외면은 묵인의 또 다른 얼굴이다.

언론은 사실을 전해야 하며, 정치인은 분열이 아닌 연대를 말해야 한다. 교육은 타자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며, 시민사회는 혐오에 맞서는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력이 아니라, 소수를 보호하고 이견을 존중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혐오에 맞선 연대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20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배웠다. 파시즘은 언제나 ‘작은 혐오’에서 시작되었고, 사회가 이를 방치할 때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중국 혐오’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경고음이다. 이를 비판하고, 거부하고,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극우 파시즘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연대와 저항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는 것이다.

혐오에 맞선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